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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위 (오호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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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위는 오호 십육국 시대에 정령족이 세운 국가이다. 383년 전진의 멸망 이후 정령족 수장 적빈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적진, 적료 시대를 거쳐 적조에 이르러 392년 멸망했다. 적위는 후연, 동진과 대립했으며, 적료는 위(魏)나라를 세우고 천왕을 칭했다. 적위의 군주는 천왕을 칭했으며, 건광과 정정의 연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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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위 (오호 십육국)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통칭적위 (翟魏)
국명위 (魏)
시대오호 십육국 시대
존속 기간388년 - 392년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활태 (滑台)
391년의 십육국 시대 지도, 적위 위치 표시
391년 적위의 위치
역사
건국388년 2월
멸망392년 6월
주요 사건적료후연과의 마지막 결별 (387년)
주요 사건 2적조의 서연에 의한 처형 (393년)
이전적요의 후연과의 마지막 결별 (387년)
이후적조의 서연에 의한 처형 (393년)
역대 군주
초대 천왕적료 (翟遼) (388년 - 391년)
제2대 천왕적조 (翟釗) (391년 - 392년)
언어 및 종교
공용어(정보 없음)
종교(정보 없음)
현재
현재 국가중국

2. 역사

정령(丁零)족은 원래 중앙아시아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고거(高車), 철륵(鐵勒) 등으로 불렸다.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기에 정령족의 일파가 화북 평원으로 남하하였는데, 전진의 부견(苻堅)은 이들을 받아들여 화북 각지에 분산시켜 거주시켰다. 정령족의 수장이었던 적빈(翟斌)은 낙양 인근에 거주하였다.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배하자 적빈은 낙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수가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적빈은 모용수에게 투항하여 그를 맹주로 삼았고, 이후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모용수가 업을 포위하는 동안 적빈은 전진의 부비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적빈 사후, 그의 조카 적진(翟眞)이 정령족을 이끌었다. 385년, 적진이 그의 장군 선우기(鮮于乞)에게 암살당하고, 선우기는 다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1] 병사들은 적진의 사촌 적성(翟成)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지만, 많은 정령족 병사들이 후연으로 투항했다.[1] 그해 말, 모용수가 싱탕을 포위했을 때, 적성의 장군 선우덕(鮮于得)이 적성을 참수하고 후연에 항복했다. 모용수는 싱탕을 학살했지만, 적성의 사촌 적료(翟遼)는 여양(黎陽)에서 동진(東晉)으로 탈출했다.[1]

386년, 적료는 반란을 일으켜 여양을 장악했고, 태산군의 동진 태수 장원(張願)이 그에게 합류했다.[1] 387년, 모용수는 자신의 장군들을 보내 적료를 공격하여 그를 굴복시켰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 388년, 적료는 스스로 위(魏) 천왕(天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

391년 아버지 적료가 죽자 적조가 뒤를 이었다. 392년,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적위를 공격했다. 적조는 모용수의 속임수에 넘어가 황하 도하를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서연으로 도주하여 모용영에게 의탁했다가 1년 후 반란을 획책하다가 참수되었다.

2. 1. 건국 이전

정령(丁零)족은 원래 중앙아시아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고거(高車), 철륵(鐵勒) 등으로도 불렸다.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기에 정령족의 일파가 화북 평원으로 남하하였는데, 전진의 부견(苻堅)은 이들을 받아들여 화북 각지에 분산시켜 거주시켰다. 정령족의 수장이었던 적빈(翟斌)은 낙양 인근에 거주하였다.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배하자 적빈은 낙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수가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적빈은 모용수에게 투항하여 그를 맹주로 삼았고, 이후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모용수가 업을 포위하는 동안 적빈은 전진의 부비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적빈 사후, 그의 조카 적진(翟眞)이 정령족을 이끌었다. 385년, 적진이 그의 장군 선우기(鮮于乞)에게 암살당하고, 선우기는 다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1] 병사들은 적진의 사촌 적성(翟成)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지만, 많은 정령족 병사들이 후연으로 투항했다.[1] 그해 말, 모용수가 싱탕을 포위했을 때, 적성의 장군 선우덕(鮮于得)이 적성을 참수하고 후연에 항복했다. 모용수는 싱탕을 학살했지만, 적성의 사촌 적료(翟遼)는 여양(黎陽)에서 동진(東晉)으로 탈출했다.[1]

386년, 적료는 반란을 일으켜 여양을 장악했고, 태산군의 동진 태수 장원(張願)이 그에게 합류했다.[1] 후연에서는 위군과 고평군에서 잇달아 반란이 발생했고, 그들은 모두 적료에게 합류했다.[1] 387년, 모용수는 자신의 장군들을 보내 적료를 공격하여 그를 굴복시켰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 388년, 적료는 스스로 위(魏) 천왕(天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

2. 1. 1. 적빈(翟斌)의 거병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배하자, 적빈(翟斌)은 낙양 인근에서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하였다. 모용수가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적빈은 모용수에게 투항하여 맹주로 삼았고, 뒤이어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는데 힘을 보탰다.

383년 12월, 전진의 위군 종사 중랑이었던 적빈은 하남에서 거병하여, 전진의 예주자사·평원공 부휘를 낙양에서 공격했다.[3] 장락공 부비는 모용수와 부비룡에게 이를 토벌하게 했지만, 모용수가 몰래 전연을 부흥시키려 획책하여 적빈의 정령(丁零)과 결탁하여 전진에 반란을 일으켜 남하했고, 부비룡을 죽이고 그 무리를 산 채로 매장했다.[3] 모용봉과, 전연의 고신(故臣)의 아들인 연군의 왕등·요서의 단연 등은 적빈의 거병을 듣고, 각 부곡을 이끌고 이에 귀속했다.[3] 부휘는 무평후 모당에게 적빈을 토벌하게 했지만, 정령의 무리는 적빈을 따라 진병에게 대승을 거두고 모당을 참수했다.[3] 적빈은 마침내 능운대(陵雲台) 수(戍)를 침공하여, 만여 명의 갑병을 획득했다.[3]

384년 1월, 모용봉·왕등·단연 등이 모용수를 맹주로 추대할 것을 권하자, 적빈도 이에 따랐다.[3] 모용수가 대장군·대도독·연왕을 칭하며 후연을 건국하자, 동생인 모용덕을 차기대장군·범양왕, 형인 모용각의 적남인 모용개를 정서대장군·태원왕, 적빈을 건의대장군·하남왕, 전 부여왕 여위를 정동장군·부여왕, 창려선비위구를 잉양장군, 모용봉을 건책장군으로 삼았다.[3]

모용수가 업을 포위하고 전쟁이 길어지자 적빈은 전진의 부비 쪽에 붙어 모용수의 진중에서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반은 실패하여 적빈은 죽었으며 적빈의 조카인 적진이 정령족을 이끌고 도망쳤다.

같은 해 2월, 모용수는 정령과 오환의 무리 20여만 명을 이끌고 업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3] 같은 해 7월, 적빈은 공을 믿고 교만해져, 업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는 모용수에게 몰래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3] 이를 눈치챈 태자 모용보모용농·모용소 (모용개의 동생), 그리고 모용덕 등이 적빈을 제거할 것을 모용수에게 청했지만, 공적이 있는 적빈을 제거할 수는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3] 이윽고 적빈은 상서령이 되기를 청했지만, 모용수에게 거절당하자, 몰래 부비와 통모하여 정령인들에게 업성 수공을 위한 제방을 무너뜨리게 했다.[3] 이 사실이 발각되자, 적빈 및 그의 동생 적단과 적민이 모용수에게 살해당했다.[3]

2. 1. 2. 적진(翟眞)과 적성(翟成) 시대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배한 후, 적빈(翟斌)은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했다. 모용수가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적빈은 모용수에게 투항하여 맹주로 삼았고, 후연 건국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적빈은 전진의 부비 쪽에 붙어 모용수의 진중에서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죽었다. 적빈의 조카인 적진(翟眞)이 정령족을 이끌고 도망쳤다.

384년 8월, 적진은 군대를 이끌고 한단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업으로 돌아와 부비와 내외로 호응하려 했다. 그러나 후연 태자 모용보모용륭에게 격파당하여 한단으로 도주했다. 이후 적진은 승영에 머물면서 전진과 내통했다. 후연군은 지쳐 있었고, 전진의 세력은 다시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모용륭은 전진의 소흥을 격파하고, 기주의 군현은 다시 후연을 따르게 되었다.[3]

385년 4월, 적진이 승영에서 형당으로 이동하자, 적진의 사마 선우걸이 적진과 여러 사람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조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정령족은 선우걸을 살해하고, 적진의 종제인 적인을 세워 주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많은 수가 후연에 항복했고, 적료는 여양으로 도주했다. 5월, 모용수는 상산에 이르러 적인을 행당에서 포위했다. 7월, 적인의 장사 선우득이 적인을 참수하고 모용수에게 항복했다. 모용수는 행당을 함락시키고 적인의 무리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

같은 해, 적성(翟成)이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지만, 이 시점에서 많은 정령족 병사들이 후연으로 투항했다. 그 해 말, 모용수가 싱탕을 포위했을 때, 적성의 장군 선우덕(鮮于得)이 그를 참수하고 후연에 항복했다. 모용수는 싱탕을 학살했다.[1]

2. 1. 3. 적료(翟遼) 시대

386년, 적료동진(東晉) 여양(黎陽) 태수 등첨지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등첨지가 병사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몰래 계략을 꾸몄다.[1] 등첨지가 남쪽의 녹명성을 공격할 때, 뒤에 있던 적료는 문을 닫아 등첨지가 돌아오지 못하게 했고, 동쪽의 권성으로 도망가려던 등첨지를 쫓아가 붙잡아 여양을 빼앗았다.[1] 동진의 예주 자사 주서는 장군 진응과 동빈을 보내 회·사 지역의 여러 군과 함께 이를 토벌했다.[1] 387년 4월, 고평의 적창은 태수 서함원을 붙잡아 군 전체를 이끌고 적료에게 항복했다. [2]

387년 5월, 모용수가 모용개를 전봉도독으로 삼고 여러 장수를 이끌고 남쪽의 적료를 공격했다.[2] 적료의 무리들은 모두 연과 조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용개가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귀순했다.[2] 적료는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고,[2] 모용수는 이를 승낙하고 적료를 서주 목·하남공으로 봉하고 귀환했다.[2] 그러나 387년 10월, 적료는 후연(後燕)에 반역하여 왕조와 장신과 함께 청하군과 평원군을 약탈했다.[2]

적료는 388년 2월에 위(魏)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적위(翟魏)라 한다. 적료는 천왕을 자처하며 후연, 동진을 노략질하였다.[3]

2. 2. 적위 건국

정령은 원래 중앙아시아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고거, 고차(高車), 철륵(鐵勒) 등으로 불렸다.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기에 정령 일파가 화북 평원으로 남하하였는데, 전진의 부견(苻堅)은 이들을 받아들여 화북 각지에 살게 하였다. 330년, 정령족 추장 적빈(翟斌)은 후조로부터 거정공 칭호를 받았다.[1] 371년, 전진 치하에서 적빈과 정령족들은 신안현과 면지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1]

383년 비수대전 이후 적빈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했다. 모용수가 토벌군을 이끌고 오자 적빈은 모용수에게 투항하여 맹주로 삼았고,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적빈은 업을 포위하는 동안 더 많은 것을 요구하다가 거부되자 전진으로 투항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적빈의 조카 적진(翟眞)이 정령족을 이끌고 도망쳤다. 385년 적진이 죽고 적진의 사촌형 적료(翟遼)가 일부 부락을 이끌고 남하, 황하를 건너 여양의 동진 세력에 항복하였다. 386년 적료는 반란을 일으켜 여양을 점거하고 산둥성 서부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였다.

388년 2월, 적료는 사마 추경을 후연에 보내 사죄했지만, 모용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추경을 참수했다. 이에 적료는 스스로 '''위천왕'''(魏天王)이라 칭하고, 건광(建光)으로 개원하여 백관을 두었다. 5월, 적료는 활대로 옮겨 주둔했다.[3]

2. 2. 1. 후연과의 갈등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배하자 적빈(翟斌)은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하였다. 모용수가 이끄는 토벌군이 오자 적빈은 모용수에게 투항하여 맹주로 삼았고, 뒤이어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채빈은 곧 자신의 위치에 불만을 품고 모용수가 업을 포위하는 동안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의 요구가 거부되자, 그는 정령족과 함께 전진으로 투항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 모용수가 업을 포위하고 전쟁이 길어지자 적빈은 전진의 부비 쪽에 붙어 모용수의 진중에서 모반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었다. 적빈의 조카인 적진(翟眞)이 정령족을 이끌고 도망쳤다. 채진은 업에서 도망쳐 반란을 일으키고, 징영(현재의 싱타이시 주변)에 근거지를 세우고 전진과 동맹을 맺었다.[1]

이후 화북 각지에서 후연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던 정령족은 385년에 적진이 죽고 뒤를 이은 적성(翟成)도 무너지면서 화북 일대에서 세력이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한편 적진의 사촌형 적료(翟遼)는 적진이 죽자 일부 부락을 이끌고 남하, 황하를 건너 여양의 동진 세력에 항복하였다. 386년에 반란을 일으켜 여양을 점거하고 산동성 서부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였다. 387년에 후연이 공격해오자 적료는 후연에 복속되었다. 386년, 채료는 반란을 일으켜 여양을 장악했고, 태산군의 동진 태수 장원이 그에게 합류했다. 후연에서는 위군고평군에서 잇달아 반란이 발생했고, 그들은 모두 채료에게 합류했다. 387년, 모용수는 자신의 장군들을 보내 채료를 공격하여 그를 굴복시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

적료는 노(魯) 지역에서 할거 하다가, 10월에 후연을 배반하고 자립하여, 388년 2월에 적위를 건국하였다. 적료는 천왕을 자처하며 후연, 동진을 노략질하였다. 적료에 이어 적조가 뒤를 이었다. 388년, 그는 자신의 죄를 사과하기 위해 모용수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모용수는 그의 반복적인 배신 행위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채료는 스스로 위(魏)의 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 채료는 새로운 연호를 선포하고 황실 관청을 설치하여 중국식 통치 체제를 채택했다. 그는 수도를 화태로 옮기고 황하를 후연에 대한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지만, 재위 기간 동안에는 동진과 더 자주 충돌했다.[2]

392년 새해가 밝자 모용수는 노략질을 일삼는 적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적조는 이에 대응하여 관도를 선제공격하며 역공세를 폈다. 모용수가 여양에서 도하할 준비를 하자 적조가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한다. 모용수는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서진으로 군영을 옮기고 함선 100여 척을 만들어 도하하려는 속임 전법을 구사한다.

적조는 모용수의 속임수에 넘어가 서진으로 병력을 이동하였다. 적조가 여양진을 비운 사이 숨겨두었던 모용진의 별동대가 황하를 건너 군영을 설치하였다. 적조는 다시 여양진으로 돌아가 적의 군영을 공격하였으나 서진에서 건너온 모용농 군대에 협공을 받아 패배하였다.

적조는 단신으로 서연으로 도주하여 모용영에 휘하에 들어갔으나 1년 후 반란을 획책하다가 참수되었다.

2. 2. 2. 동진과의 갈등

386년, 적료(翟遼)는 반란을 일으켜 동진(東晉)의 여양을 점거하고 산둥성 서부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였다.[1] 387년 후연(後燕)이 공격해오자 적료는 후연에 복속되었다.[1]

388년 2월, 적료는 노 지역에서 할거하다가 후연을 배반하고 자립하여 위(魏)나라(적위)를 세웠다.[1] 적료는 천왕을 자처하며 후연과 동진을 노략질하였다.[1]

389년, 적료는 동진으로부터 영양군(滎陽郡)(대략 현대의 정저우)을 점령했고, 후연의 왕자이자 기주 자사였던 모용온을 암살했다.[2] 390년에는 동진으로부터 낙양을 점령하려 했으나 격퇴당했다.[2] 유노지가 이끄는 동진군은 태산을 점령하고 화태(滑台)에서 적료를 격파했지만, 군대를 철수하여 적위(翟魏)를 멸망시키지는 못했다.[2]

2. 3. 적조(翟釗) 시대와 멸망

적조는 적위의 마지막 군주였다. 391년 아버지 적료가 죽자 뒤를 이어 천왕 자리에 올랐고, 연호를 정정(定鼎)으로 고쳤다.[1] 즉위 직후 후연의 업을 공격했으나, 모용농에게 격퇴당했다.[2]

392년,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적위를 공격했다. 적조는 장수 적도를 보내 관도를 공격하고 소강루에 주둔하게 하여 모용수의 공격에 맞섰다.[2] 그러나 모용수는 노구에서 하간, 발해, 평원에 이르렀고, 적도는 활대로 도망쳤다가 다시 여양으로 물러났다.[2]

모용수가 여양진에서 황하를 건너려 하자, 적조는 병력을 배치하여 이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모용수는 가짜 병사를 이용해 적조의 주의를 끄는 사이, 몰래 다른 곳에서 황하를 건너는 데 성공했다.[1][2] 적조는 처자와 수백 기를 이끌고 백록산으로 도망쳤고, 모용농이 추격하여 적조의 무리를 사로잡았다. 적조는 홀로 서연의 장자로 도망쳤고, 이로써 적위는 멸망했다.[1][2]

모용수는 적위가 다스리던 7군 3만 8천 호를 이전과 같이 대우하고, 서주의 유민 7천여 호를 여양으로 옮겼다.[2] 적조는 서연의 군주 모용영에게 의탁하여 차기대장군, 동군왕에 봉해졌으나, 1년여 뒤 모용영을 죽이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2]

3. 역대 군주

적위의 군주들은 천왕을 칭하였다.

이름재위 기간연호
적료388년~391년건광(建光) 388년~391년
적조391년~392년정정(定鼎) 391년~392년


4. 연호

연호재위 기간
건광388년 ~ 391년
정정391년 ~ 392년


참조

[1] 서적 通志
[2] 서적 資治通鑑
[3]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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